퇴계오솔길 (예던길) 예던 길을 따라서...
′도산의 길′ 마지막은 ′천사川沙′에서 ′청량산′산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천사는 그 깃 점으로 여기서 부터 청량산산행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온혜에서 청량산까지 국도가 바로 뚫려 있지만, 옛길은 천사-단사-가송-너분들로 이어지는 강변길이었다.
′도산9곡′ 가운데 7의 단사곡, 8곡의 가송곡, 9곡의 청량곡이 몰려있는 곳으로, 청량산의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어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이 길을 걸어가며 글을 쓰고 시를 지은 유서 깊은 길이었다.
마치 무슬램이 메카를 찾아가듯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도 이 길은 생애 한번 걸어가는 꿈을 순례길 이었다. 금강산과 버금가는 80여 편의 기행문과, 2,000여 편의 시가 남아있다.
퇴계는 이길을 ′그림 속′ 이라고 했고, 자신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퇴계는 이 길을 따라 청량산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래서 이길을 퇴계가 그리던 이른바 ′예던 길′ 이라 이름 하여 본다.
퇴계는 생애 7번 정도 갔다. 그때마다 단촐 한 산행이었다.
그런데 1564년은 달랐다 16명을 초청했는데 13명이 참가했다. 혼자 사색하기를 좋아하며, 집단적 모임을 주도한 일이 거의 없는 퇴계에게 이 해 산행은 ′퇴계식의 일상′으로 볼때 매우 의례적이다.
′유산游山′의 의미를 알게 하고자 한 계획적인 산행으로, 퇴계 전 생애의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또한 마지막 청량산 산행이기도 했다.
이날 천사에서 퇴계는 참석자 가운데 유일한 친구인 이문량李文樑에게 이런 시를 썼다.
烟巒簇簇水溶溶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曙色初分壹欲紅 새벽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溪上待君君不芝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擧鞭先入畵圖中 내 먼저 고삐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앞의 넓은 못이 ′백운지白雲池′이고, 멀리 수직단애는 ′학소대′이며 그 산 뒤로 청량산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청량산을 볼 수 있는 전망대로 이곳이 가장 멋진 지점이라 할 수 있다.
퇴계가 언급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런 지점이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청량산 산행이 시작되며, 지금 조성된 ′예던 길′도 바로 여기서 부터이다. 이제부터는 차량진입이 불가능한 옛 길 그대로의 길이다 4km, 1시간 정도 거리이다.
칸트가 걸어 전 세계인이 걷는다는 유명한 ′철인의 길′ 10배 이상의 유서 깊고 멋진 길이 아닐 수 없다. 이지점에서 쓴 퇴계 시는 이러하다
曲折屢渡淸凉灘 구비 구비 맑은 여울지나니,
突兀始見高高山 우뚝 솟은 높은 산 비로소 보이네.
淸凉高高隱復見 청량산은 숨은 듯 다시 보이고,
蕪窮變態拱吟鞍 무궁한 모습, 시심을 북돋우네.
′미천장담彌川長潭′은 우리말로 ′매내 긴 소′이다. 강 건너 평평한 지역이 ′맹개′라는 지역이고, 강 우측 언덕이 삽재이며 좌측 수직 절벽이 ′학소대′ 이다.
퇴계의 시가 있으며, 강변 너럭바위에는 시조새, 공룡 등으로 추정되는 발자국 화석이 대량으로 찍혀있다.
학소대 수직단애의 위로는 물길이 90도로 급박하게 우측으로 하회를 이루며, 병풍 같은 단애인 벽력암과 은빛 백사장이 나타나는데 여기서부터는 ′가송협′ 이고 이 일대 지명은 ′올미재′이다.
퇴계의 ′미천장담′의 시는 이러하다.
長憶童恃釣此間 어린시절 낚시 하는 곳,
卅年風月負塵寰 삼십년 세월 풍진 속에 저버렸네.
我來識得溪山面 산천모습이야 내 어찌 잊었으랴만,
未必溪山識老顔 산천이 나를 알아볼 수 있을는지.
경암은 과거 ′백바위′ 라고도 했는데, 어떤 연유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4개의 바위가 물가에 친구처럼 붙어 있어 과연 5,6,인이 모여 즐길만하다.
퇴계는 청량산에 가던 도중 이바위에서 쉬면서 제자들을 기다리는 글을 남겼고, “경암′시에 ‘천년동안 물과 부딕쳤으나 그 모습 변함없고, 물속에 우뚝하여 아직도 늠름하다” 했다. 시 전문은 이러하다.
激水千年詎有窮 천년 동안 물과 부딛쳤으나 그 모습 변함없고,
中流屹屹勢爭雄 물속에 우뚝하여 아직도 늠름하다.
人生蹤迹如浮梗 인생이란 허수아비 같은 존재,
立脚誰能似此中 어느 누가 다리 세워 이와 같이 굳건하랴.
학소대와 먹황새서식지비석
이곳 올미재의 수직단애는 천년기념물 ′먹황새′가 서식하여 ′학소대′로 명명되고 있다. 오학은 세계적인 희귀 새며, 한반도는 이곳이 마지막 서식처였다. 1969년, 사냥꾼에 의해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암컷 한 마리가 몇해를 수절하다 떠나갔고, 그 아래 天然記念物 第七十二號 烏鶴繁殖地 大韓民國이라 새긴 비석이 남아있다.
그런데 고산정 옆에는 지금 朝鮮聰督부 라고 쓴 또 다른 먹황새 기념 비석이 있으며, 도산7곡인 ′단사남벽′의 ′칼선대′에도 한때 서식했다. 그러니까 당시 먹황새의 주요서식지가 단천과 이곳 가송을 반경으로 하는 일대의 강변과 단애였음을 알 수 있다.
′벽력암′과 한속담′은 이 고장 읍지인 선성지宣城誌에 “벽력암 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소가 있음”, 이라고만 적혀있고 오가산지吾家山誌에, “일동日洞(가사리)아래 두 개의 못이 있으니 ′월명담′과 ′한속담′이다.
그 아래 ′경암′이 있는데, 위아래가 편편하여 5,6인이 앉을 만하고, 여기서 남쪽으로 ′미천 장담′이 구비 흐르고, 얼마나 지나면 백운동이라” 쓰여 있다. 이글을 보면 벽력암 아래 소는 ′한속담′으로 추정되고, 학소대 아래 바위가 ′경암′이 된다.
벽력암에 관한 글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지역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절벽의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벼락치듯 하여 ′벼락소′라 했고, 강원도의 뗏목들이 여기에 오면 벼락 치는 소리를 하며 절벽에 부딪치어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했고, ′한속′은 추울때 몸에 돋는 소름을 말하는데 절벽 뒤편 음지의 추위와 연관되어 지어진듯하다.
퇴계의 한속담 시는 이러하다.
瘦瑪稜兢越翠岑 여원 말로 푸른 뫼 넘어서니,
俯窺幽壑氣蕭森 깊은 골짜기 찬 기운 감도네.
淸遊步步皆仙償 한 걸음 한 걸음 갈수록 선경이고,
怪石長松樠碧尋 괴석 장송이 강가에 가득하다.
월명담
‘월명담月明潭’은 달빛 쏟아지는 연못 같아 선인들이 ′못′이라 했다. 못에 용이 산다고 했던가? 용의 등천이 비와 관련이 있는가? 아무튼 이 고요한 못 층 벽에 ‘도우단禱雨壇’ 이 있어서 고을수령들은 돼지를 잡아 기우제를 지냈고 이 전통은 30여 년 전까지도 주민들의 의해 이어졌다.
그 언어는 “용도용도 물 주소, 도량용도 물주소”였다. 이 말은 사물장단에 맞추어 제단 앞에서 오래도록 반복되었고, 이윽고 자정에 오면 제사를 지내고 돼지머리를 강물에 띄웠다.
주민들은 지금도 “그때 제를 지내고 나면 신기하게도 비가 왔다”고 했다. 믿음은 소망을 이루어주는 완강하고 기나긴 영적 결심이다.
퇴계의 시는 이렇다.
窈然潭洞秀而淸 그윽하고 맑은 소 빼어나고 푸르니,
陰囂中欌木石靈 그 속 깊은 곳 목석 신령 간직했네.
十日愁霖昑可霽 10일 동안 내린 비 이제야 개이니,
抱珠歸臥月冥冥 용아 구슬 안고 아늑한 달 속으로 돌아가라.
‘고산정孤山亭’ 위 절벽은 ‘취벽翠壁’이며 맞은편 산이 ‘고산孤山’이고 가운데 강은 ‘도영담倒影潭’이라 했다. 고산의 절벽 낚시터는 ‘조대釣臺’이고 가운데 배를 대기 좋은 바위가 ‘계주암繫舟巖’이다.
고산은 억겁의 세월 물에 의해 소종래所從來가 강제로 끊어진 그야말로 외로운 산으로 선인들은 “강가의 자리한 푸른 골뱅이 한 마리의 모습” 이라 했다.
고산정은 선조 때 명신 심희수의 시에 “그 진경은 그림이나 글로서는 묘사하기 어렵다(眞景難摹畵筆端)”의 구절처럼 절경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정자 주인은 금란수琴蘭秀(1530-1604)로 호가 성재惺齎이며 퇴계 제자 이다. 부포가 고향인 성재는 이 ‘예던 길’을 따라 올라왔다가 여기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래서 만년의 ‘장구지소杖屨之所’로 삼았는데 어느 해는 이곳 경치에 매료되어 한 해에 여섯 번을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 시는 이렇다.
一歲中間六度歸 한 해 여섯 번을 왔건만,
四時佳興得蕪違 사철 풍광 어김없네.
紅花落盡靑林暗 붉은 꽃잎 떨어지자 녹음 짙어지고,
黃葉飄餘白雲飛 노란 낙엽 땅에 지니 흰 눈 날리네.
砂峽乘風披裌服 단사협 바람이 옷깃을 헤치고,
長潭逢雨荷簑衣 매네 긴 소에서 비가 도롱이를 적시네.
箇中別侑風流在 이 중에 풍류 있으니,
醉向寒波弄月輝 취하여 강물 속의 달빛을 희롱하네.
성재는 자신의 취향속에 ‘풍류가 있다’고 했다. 풍류는 바람처럼 흐르고 예술적으로 노는 것을 말함이니, 성재는 진정 그런 감정에 젖어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제자를 청량산 길에 찾은 퇴계의 시는 더욱 희화적(戱畵的)이다
日洞主人琴氏子 일동주인 금씨를,
隔水呼問昑在否 지금 계시는지 강 건너로 물어보니.
耕夫煇手語不聞 농부는 손 저으며 내 말 못들은 듯,
脹望雲山獨坐久 구름 낀 산 바라보면 한참을 앉았네.
성재의 막내아들 금각琴恪은 하늘이 내린 사람으로 7,8세에 이미 세상이치를 터득했다고 했다. 허난설헌의 오빠인 허봉에게 배웠는데, 허봉이 금각에게 준 시 한 구절에는 “금각의 시는 이태백을 능가 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또한 저 유명한 ‘등왕각서’를 쓴 “왕발과도 비견된다” 고 하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하다”고도 했다. 그러나 금각은 불과 18세에 요절하여 사람들은 “천재가 쓰이지 못하고 사라진다” 고 했다.
금각이 16세에 가송리의 풍광을 묘사한 글이 ‘일동록’ 인데 내용은 이러하다.
“예안 북쪽 산이 청량이요 그 남쪽 봉이 ‘축융’ 이다. 축융 아래 마을이 ‘일동’이다. 마을은 그윽하고 조용하다. 산은 높지만 좁지 아니하여 ‘어진 사람이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물을 좋아함’을 다 갖추었으니, 참으로 은자가 살아갈 만한 낙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땅이지만 아직 이곳을 즐기는 사람이 없어, 별천지 세계가 숲 속에 버려져 있고, 또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그 후 아버지가 이곳을 드러나게 했으니, 이곳은 곧 하늘이 땅을 만들어 간직했다가 내어준 것이리라.”
‘가송佳松’은 ‘도산9곡’에서 제8곡으로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며, 금각의 표현대로 “별천지 세계이며, 하늘이 땅을 만들어 간직한 고반의 낙지”이다.
1400여리의 낙동강에 강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이곳에서 모두 보여주고 있다. 곡曲, 소沼, 담(潭), 지(池), 암(巖), 협(峽) 등이 이 일대를 지나는 낙동강이 청량산과 더불어 연출하고 있다.
그런 즐겁고 행복한 땅, ‘낙지樂地’였기에 먹황새들이 이곳 곳곳에 날아들어 그 옛날의 낙지임을 증명하고 있다.
걸작의 『안동향토지』를 쓴 송지향 선생은 “안동 땅의 산수미를 꼽으라면 선뜻 가송협을 들 만큼 여기가 영가 산수의 압권으로, 구차하게 그 자세한 이름들을 알 필요조차 작고 부질없는짓” 이라 했다.
‘공주당公主堂’은 공민왕의 부인인 노국대장공주를 모시는 당으로, 축융봉 아래에 있는 ‘공민왕당’과 지근거리에 있다.
이는 천사 왕모산의 ‘왕모당’과 북곡리의 ‘부인당’과 더불어 당시 몽진 대열에 있었던 왕과 왕후와 노국공주와 차비 이씨 등의 고려사의 문헌과 일치한다.
이들을 모신 당들은 지금 모두 주민들에 의해 600여년을 이어오는 추모의식이 행해지고 있다.
특히 가송리 동제는 동제 가운데 유일하게 주민 모두가 함께하는 사물놀이가 있고, 그 사물놀이는 12진법이라는 독특한 진법으로 구성되서 있다. 12진법은 과거 3,4 시간에 걸친 전 과정이 진행 되었는데 지금은 30분 정도의 행사로 축약되었다.
***농암 이현보 (聾巖 李賢輔: 1467-1555)
자字는 비중棐仲, 호號는 농암聾巖,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20세 때 홍귀달哄貴達 선생께 수학하고 32세에 문과 급제했다.
36세에 사관으로 사초史草를 바르게 쓸 수 있도록 직언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얻었고, 38세 때는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으로 유배되었다. 연산군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하니, 친구들은 선생의 이런 강직함을 보고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했다. 사관史官으로서 유일하게 사지死地를 벗어난 경우이다.
중종반정으로 복직되어 형조참판, 호조참판,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으나, 그때마다 외직을 자청하여 영천, 안동, 경주, 대구, 경상도관찰사 등의 8개 고을살이도 했다.
경직京職을 절대적으로 선호한 당시의 정치풍토로 볼때, 외직의 자청은 남다른孝心 때문이기도 하지만 민생에 보다 가깝게 가고자 하는 일관된 신념이었다. 동료들의 신망과 존경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안동부사 시절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에는 80세 이상의 남녀귀천을 한자리에 함께 초청하는 파격적인 면모를 보이는데, 이런 측면은 집안에서도 “자제와 비복들을 편애하지 않았고 혼인도 문벌 집안을 찾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함에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았다”는 퇴계선생의 행장行狀 기록과 일치한다.
주민의 전출과 길을 가로막는 사건들에서, 선생이 당대에 계층을 초월하고 누렸던 인기는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선생은 휴머니즘이 가득한 목민관으로, 대시인大詩人이며 대효자大孝子였다. 화산양로연은 고향에서 마련한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로 이어졌고, 여기서도 선생은 70세 노구의 몸으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90세 부모와 노인들을 즐겁게 했다.
이런 경로모습에 동료친구들이 일제히 축하시를 보냈고, 지금 그 친필시 40편이 그래도 종택에 보존되어 있으니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보물 1202호)이 바로 그 책이다. ‘애일당구로회’는 아들, 손자로 이어졌고, 이후 400여 년을 이어오는 농암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선생은 국왕과 동료의 만류를 뿌리치고 표연히 귀거래했다. 선생을 위한 전별연餞別宴은 조선조 유일의 정계은퇴식으로, 국왕은 금포金袍와 금서대金犀帶를 하사했고, 관료들은 일제히 전별 시詩를 지어 선물했다.
한강까지 이어진 행차를 보고 도성사람들이 담장처럼 둘러서서 ‘이런 모습은 고금에 없는 성사’라고 했고, 퇴계는 “지금 사람들은 이러한 은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라고 했다.
김중청金中淸은 이 은퇴에 대해 “회재晦齋(李彦迪), 충재冲齋(權橃)께서 전송대열에 서고, 모재慕齋(金安國), 퇴계退溪(李滉)께서 시를 지어 전별했으니, 중국의 소광疏廣, 소수疏受의 은퇴에 어찌 비교되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수천 년 역사 이래 없었던 일로, 우리 농암선생이야말로 천백만 명 가운데 단 한 분뿐이다”라고 찬양했다. 『실록』은 이를 ‘염퇴恬退’라 규정했다.
은퇴 후 선생은 농부로 자임自任하고 일게 서생書生과 다름없는 담백하고 물욕 없는 생활을 하여 ‘유선儒仙’으로 추앙받았다.
그리고 천성적인 시인 으로, 분강의 강가를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거닐면서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낭만적 풍경’을 연출했다. 이 감흥과 미의식이 그대로 문학과 예술이 되었다. 이런 강호생활은 분강, 애일당을 예방한 동료, 후배들에 의해 ‘영남가단嶺南歌壇’이 형성되는 모태가 되었다.
특히 퇴계는 동향의 후배로써 인간적, 문학적으로 남다른 교류를 했으며, ‘어부가’의 발문에서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은 신선과 같았으니, 아! 선생은 이미 강호의 그 진락眞樂을 얻었다”라고 찬양했다.
관료적문학이 성행할 때, ‘강호지락江湖之樂’과 ‘강호지미江湖之美’라는 새로운 문학세계의 지평을 열며, ‘어부장가’, ‘어부단가’를 비롯한 ‘효빈가’, ‘농암가’, ‘생일가’ 등의 시가작품을 남겨, 한국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쳐 ‘강호문학의 창도자’로 평가받았다.
‘어부단가’ 5장 가운데 그 2장’은 이러하다.
굽어보면 千尋綠水, 돌아보니 萬疊靑山,
열 길 티끌세상에 얼마나 가렸는가.
江湖에 月白하거든 더욱 無心하여라.
‘어부가’는 이후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었고, 이한진李漢鎭의 ‘속어부사’, 이형상 李衡祥의 ‘창보사’ 등에 이어지고, 드디어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졌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서문에서 “어부사를 읊으면 갑자기 강에 바람이 일고 바다에는 비가 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표표하여 유세독립의 정서가 일어나게 했다. 이런 까닭으로 농암 선생께서 좋아하셨 으며 퇴계 선생께서도 탄상해 마지 않으셨다”고 했다.
안동지역에서는 17세기 김응조金應祖, 18세기 권두경權斗經, 19세기 이휘영李彙寧 등의 문집 기록에 “분강에서 농암의 ‘어부가’를 다 함께 불렀다”고 하여, 학술적 계승이 아닌 현장연출로서 수백년의 집단적 전승이 있었음을 밝혀 놓았다 그래서 국문학사에 宋純-鄭澈로 이어지는 ‘호남가단糊南歌壇’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고 했다.
만년에 耆老所에 입소되는 영예를 얻었으며, 명종으로부터 “경은 진실로 천하대로天下大老요 당세원구當世元龜라. 염퇴이양恬退頤養이 이미 명철보신明哲保身을 넘었으면 정관선기靜觀先幾했다" 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은퇴 후 거듭되는 상경上京 명령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지 않으니, 나라에서 1품인 중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내려 예우禮遇했다. 그래서 조선전기에 보기 드문 '재야정승在野政丞'이 되었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이 직책을 띠고 있었다.
89세에 몰沒하니 나라에서는 ‘孝’와 ‘절개’의 정신을 기려 ‘효절孝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조선 500년, ‘대로大老’라고 불려 진 인물은 흔하지 않으며, ‘효절’ 이란 시호 역시 선생이 유일하다.
선생은 전 생에 걸쳐 명예를 포기 하여 더 큰 명예를 얻은 삶을 몸소 보여주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고 있다.
청백리에 녹선綠選 되었고, ‘분강서원’에 재향되었다. 문화관광부의 ‘2001년도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국가적 차원의 추모 행사가 있었고, 2007년에는 ‘때때 옷의 선비-농암 이현보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농암영정은 1537년 경상감사 집무모습을 대구 동화사 승려 옥준玉俊이 그렸다. 농암종택에는 이 영정 외에 1872년 추사 김정희가 추천한 소당小塘 이재관李在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63호)이 그린 별본 영정이 있고, 그 제작 과정이 적힌 『영정개모일기影幀改摹日記』(보물 1202호)가 있다.
선생의 모습에 대해 연산군은 “검열檢閱은 얼굴이 검붉고 볼에 털이 난 자였다”고 했고, 사관은 “강직하고 공명정대한 공무수행에 모두를 ‘소주도병 燒酒陶甁’ 이라 했으니 이는 외모는 검으나 심성心性이 냉엄(冷嚴)하다는 뜻” 이라 했다. 1997년 삼성갤러리의 ‘몽유도원도와 조선전기국보전’에 전시된 바있다.
**** 농암종택聾巖宗宅(1370-현재)
농암종택은 농암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한 집이며, 직계자손들이 650여년을 대代를 이어 살아오고 있는 집이다. 최초 이집을 지은 분은 영천이씨 안동 입향시조 이헌李軒으로, 선생의 고조부高祖父이다. 자손들은 지금 이분으로부터는 23세손 선생으로부터는 18세손가지 내려왔다.
농암선생이 ‘불천위 不遷位’로 모셔졌기에 농암종택 으로 부른다.
종택은 2,000여 평의 대지 위에 사당, 안채, 사랑채, 별채, 문간채로 구성된 본채와 긍구당, 명농당, 등의 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긍구당肯構堂’은 1350년 이헌이 지은 건물이며, ‘명농당明農堂’은 1501년 선생 나이 44세때 귀거래歸去來의 의지를 표방하고 지은 집으로, 벽 위에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렸다.
종택과 ‘분강촌汾江村’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은 여러 종류인데, 특히 1526년에 그린 ‘분천헌연도汾川獻燕圖’는 선생 당시의 풍광이 잘 나타나 있다. 바깥마당에 거목에 ‘홰나무(槐木)’가 있어 이를 ‘구인수九印樹’라 불렀다.
그 연유는 선생 당시 아들, 사위 등 9남매가 벼슬 하여 수연壽宴을 하기 위해 모이면 이 나무에 그 인끈 9개가 걸렸기 때문이었다.
또 마당에는 ‘옥인석玉印石’ ‘금상석金床石’‘이라는 우아한 4각형의 단아한 바위가 있었고, 명농당 앞에는 ‘영금당影襟塘’이라는 아담한 연못도 있다. 그러니까 종택 건물 역시 ‘긍구당’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니, 600년의 역사는 넘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1544년 신재(愼齊 周世鵬)선생이 청량산을 가던 도중에 선생을 예방했는데 그때 선생과 농암종택을 묘사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농암을 분강汾江가로 찾아뵈오니, 공이 문밖까지 나와 맞이했다. 방에 들어가 바둑을 두니 곧 술상이 나왔다. 큰 여종은 거문고를 켜고, 작은 여종이 비파를 불면서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농암의 ‘귀전부’, 이하李賀의 ‘장진주사’와 소설당蘇雪堂의 ‘행화비렴산여춘’ 등을 노래했다.
공의 아들 문량文樑은 자字가 대성大成인데 모시고 있다가 ‘축수의 노래 (壽曲)’를 불렀다. 나와 대성이 일어나 춤을 추니 공이 또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이때 공의 춘추 78세로 내 아버지의 연세여서 더욱 감회가 깊었다.
공의 거처는 비록 협소했으나 좌우로 서책이 차 있으며, 마루 끝에는 화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담 아래에는 화초가 심어져 있었고, 마당의 모래는 눈처럼 깨끗하여 그 쇄락함이 마치 신선의 집과 같았다.”
원문 “公所居殊隘 然左右圖書 堂前列置花盆 墻下植花草 庭沙如雪 欐然若人神仙宅也”
지금 종택 사랑마루에는 선조임금이 농암가문에 내린 적선積善이란 어필이 걸려있다. 크기가 무려 1m나 되는데, 선생 아들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이 왕자사부王子師傅 벼슬을 받아 선조 임금께 나아가 사은숙배하니 임금이 “너의 집은 적선지가積善之家가 아니냐” 하시고 즉석에서 써서 하사했다.
선조임금의 이런 인식과 글씨의 하사는 농암의 지극한 경로와 효성에 대한 찬양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밖에도 종택은 33점의 보물을 포함한 5천여점의 방대한 전적과 고문서 등의 유품을 국학진흥원에 기탁하여 최근 그 목록집이 발간된 바 있다.
종택을 비롯한 여러 유적들은 원래 도산서원 하류2㎞의 지점에 있던 분강촌에 있던 건물들로 1974년에 건설된 안동댐의 수침으로 말미암아 이곳 가송리 올미재로 옛 모습과 똑같이 이건 되었는데, 이곳으로 이건은 앞산 너머 청량산 남록에 있는 선생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농암종택은 안동시의 ‘고가옥활용 프로그램’에 의해 개방되어 많은 사람들이 숙박체험을 하고, 퇴계친필의 농암선생 ‘어부가’와 퇴계선생의 ‘도산 12곡’의 탁본도 한다.
1526년 농암선생 60세, 부모를 뵙기 위해 휴가를 얻어 내려왔다. 이때 경상도 관찰사 김희수金希壽가 선생의 이러한 정성을 고려하겨 수연壽宴을 주관하고, 눌재(訥齋 朴祥)선생으로 하여금 그사실을 기록하게 하고 그림 까지 남겼다. 『농암집』에 눌재 선생의 ‘분천헌연도병서’에 이 사실이 모두 기록되어있다.
그림의 좌측상단에는 종택, 우측 바위 위에는 ‘애일당愛日堂’과 강각江閣이 보이고, 그 아래는 분강汾江의 뱃놀이 풍류風流가 보인다.
이 그림은 ‘분강촌汾江村’의 실경에 가장 근접한 그림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애일당’은 선생이 부모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며, ‘강각’은 그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