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덕택에 과거 미국쪽의 가격에 따라 들쑥날쑥했던 수출량이 안정적으로 늘어났을 뿐 아니라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게 됐다. 만약 FTA가 체결되지 않았더라면 미국 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 업체와의 경쟁에서 힘들었을 것이다.
칠레에 경유를 수출하고 있는 에쓰오일의 정유제품팀 서효원 차장의 말이다. 한·칠레 FTA 이후 에쓰오일의 칠레에 대한 경유 수출은 과거와 달리 안정적이면서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3월 25일 FTA 3주년을 맞아 에르난 구띠에레스 주한 칠레대사관 상무관이 “한국은 가스오일(경유)이 230% 성장하는 등 한국 기업들의 중남미 수출이 크게 늘어났다”고 성과를 말할 정도다.
에쓰오일의 대칠레 경유 수출, 2002년보다 5배 성장
|
2002년 5000만달러였던 에쓰오일의 칠레 수출액은 2004년 8000만달러, 2005년 1억6200만달러를 거쳐 2006년 2억5300만달러로 급증했다.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수출한 금액은 벌써 2억4000만달러에 이르고 있다. FTA가 체결되기 전 전체 경유 수출량에서 칠레 수출량이 차지하는 비율은 10% 가량이었는데, 올해 초에는 벌써 전체의 30~4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는 FTA로 경쟁상대인 미국제품보다 가격경쟁력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자동차용이나 구리광산 등 산업용으로 경유 수요가 많은 칠레는 입찰을 통해 경유를 수입한다. 칠레의 수입상인 국영석유회사와 민간수입업체로부터 입찰을 따낸 무역업체(트레이더)는 공급업체를 선정해 주문한다. 이때 주로 고려되는 것이 가격경쟁력이다. 원유를 정제해 만든 석유제품은 품질에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경유 시장은 가격만 저렴하다면 큰 시장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과거에 입찰을 따낸 무역업체들이 주로 찾는 곳은 싱가포르 기준가격을 적용받는 한국업체와 미국 가격을 적용받는 미국업체였다. 그러나 무역업체들은 주로 미국쪽과 거래를 해왔다. 미국 제품을 수입하면 한국 제품 수입할 때보다 운임료가 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칠레로 제품을 운송하는데 드는 비용은 30만배럴에 200만달러 정도. 배럴당 6달러 정도의 운임료 때문에 한국 제품은 그동안 가격경쟁력에서 밀렸다.
|
물론 틈새는 있었다. 석유제품은 기본적으로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에 가격변화가 심하다는 특징이 있다. 미국의 기준가격과 싱가포르의 기준가격이 달라질 여지가 많다는 이야기다. 만약 싱가포르 기준가격이 비싼 운임료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낮다면 무역업체는 한국 제품을 찾게 된다.
특히 내수수요가 많은 미국의 경우, 수출할 제품의 양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가격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었다. 반면 에쓰오일 등 한국 업체의 공급량은 안정적이었다. 한국 업체의 공급능력은 내수 수요를 충당하고도 공급량의 50%가 남아돌 정도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덕택에 에쓰오일은 한·칠레 FTA가 발효되기 이전에도 간헐적이나마 경유를 수출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미국 경유가 배럴당 80달러이고 운임료가 3달러라고 하자. 한국 경유가 배럴당 80달러라고 하더라도 운임료 6달러를 감안하면 경쟁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 업체가 가격경쟁력을 가지려면 한국 경유값이 77달러 이하로 떨어지거나 반대로 미국 경유값이 83달러 이상으로 높아져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칠레 수출길은 막히고 만다. 과거에는 칠레에 경유를 수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 자체가 미국 가격의 변화에 좌우된다는 구조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FTA의 힘, 수출증대·수익성 제고·경쟁우위 확보
한.칠레 FTA 발효로 경유에 대한 관세 6%가 즉시 철폐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관세철폐로 배럴당 4~5달러 가량의 가격인하가 가능해졌다. 한국 경유값이 82달러로 오른다고 하더라도 관세철폐 효과를 감안하면 전체 수입비용은 83달러로 미국 경유를 수입할 때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한국 제품을 찾는 무역업체의 주문이 늘어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경유생산량이 많은 에쓰오일은 FTA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FTA로 수출량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수익성도 높아졌다. FTA 발효 이후 에쓰오일이 수출하는 경유 가격은 다른 지역 수출가격에 비해 배럴당 1~2달러 가량 더 높다. FTA로 인한 가격경쟁력 제고의 덕택이었다. 현재 에쓰오일은 칠레 수출량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칠레 수입업체의 입찰 상황 등을 파악하고 먼저 입찰을 따낸 무역업체에 연락해 에쓰오일의 강점을 알리고 있다.
이는 FTA가 체결되기 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전에는 다른 지역의 수출가격과 비교했을 때 수익이 같았기 때문에 굳이 칠레 시장 개척에 중점을 둘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FTA 이후에는 칠레에 수출을 많이 하면 할수록 수익이 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경쟁상대국을 견제하는 효과도 있다. 현재 칠레가 수입하는 초저유황경유를 생산하는 아시아 국가는 한국과 일본, 대만 정도다. 특히 2004년만 하더라도 내수 수요 때문에 수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일본과 대만 업체는 최근 국내 경유 수요가 줄어들자 수출에 적극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무역업체들은 이들 업체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관세와 운임료를 감안하면 한국 업체가 훨씬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덕택에 아시아 국가 중에선 유일하게 에쓰오일 등 한국 업체만 칠레에 경유를 수출하고 있다. 만약 FTA가 체결되지 않았더라면 아시아 국가간 경쟁으로 에쓰오일이 수출할 수 있는 물량은 예전보다 줄어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에쓰오일은 최근 칠레와 일본 사이에 맺은 FTA의 영향에 주목하고 있다. 초저유황경유를 생산하는 에쓰오일 입장에선 일본의 정유회사들이 가장 큰 경쟁 상대이기 때문이다. 에쓰오일은 칠레와 일본간의 FTA로 일본 업체의 관세가 철폐된다면 에쓰오일의 매출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속수무책인 것만은 아니다. 일본 제품은 품질이 좋지만 수출물량이 많지 않다는 것이 단점이다. 일본 정유회사는 설비 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 에쓰오일의 경우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원유를 전량 수입하기 때문에 이에 맞춰 설비를 고도화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 정유회사는 고도화 설비가 그다지 많지 않다. 일본 전체로 보면 큰 물량이 되지만 업체 하나씩 따지면 수출할만한 물량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런 까닭에 에쓰오일은 풍부한 수출물량을 활용한 안정적인 공급을 무역업체에 강조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